중국계 말레이시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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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계 말레이시아인(Chinese Malaysian)들은 말레이시아의 주요 민족이자 한족 혈통의 중국 밖 이주민인 화교이다. 외국 국적 화인에 대해서는 화예라고 쓰는 것이 맞으나 일반적으로는 편의상 화교로 통칭한다.
말레이시아에선 원주민인 말레이인, 남인도 타밀인 혈통인 인도계 말레이시아인들과 함께 세력이 강하다. 22%가 넘는 상당수 인구가 중국계이며 이들이 경제권을 쥐고 있는지라 중국계가 없으면 나라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
인구는 670만 명으로 이들은 무려 말레이시아 인구의 22%를 차지한다. 독립 당시에는 말레이시아 인구의 1/3 이상인 34% 가량을 차지했으며, 출산율도 말레이인보다 더 높았다.[1] 그나마 그 수치도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이 70%인 싱가포르가 독립되고 난 뒤 나온 통계이다.
그러나 1960년대 말을 기점으로 출산율이 말레이인들보다 뒤떨어지기 시작했고, 부미푸트라 정책의 영향과 영국, 호주/뉴질랜드 등 영어 원어민 국가들이나 대만 및 홍콩 등 중화권 국가들 그리고 이웃이자 원래 같은 나라였던 싱가포르로의 인구 유출[2] 교육열의 영향으로 출산율[3] 이 말레이인보다 낮아 인구 비중은 감소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 위의 인구감소는 어쩔 수 없는게 수많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여차하면 인종차별이 심한 자국을 탈출하고 싶어하며 그 인종차별의 원인이 바로 말레이인의 말레이시아를 표방하는 부미푸트라 정책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도계 말레이시아인들도 마찬가지인데 이들도 부미푸트라 정책 때문에 소외된 처지다. 그래도 아직까지 페낭 등 중국계 비율이 싱가포르보다 높은 도시들도 여럿 존재한다.[4]
말레이시아 내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은 쿠알라룸푸르, 이포, 페낭, 조호르바루 등 도시 지역에 많이 거주한다. 그래서 말레이시아의 대도시에 가면 중국어로 된 간판을 단 상점들을 흔하게 볼 수 있으며 쿠알라룸푸르와 페낭의 경우 대규모의 차이나타운도 형성되어 있다. 그 중 쿠알라룸푸르와 이포에는 광동성 출신 광동계 및 객가인, 치우차우계, 페낭에는 푸젠성 출신 푸젠계가 많이 거주한다. 조호르바루 등 조호르 주에는 하이난인들과 객가인 비중이 높다.
그리고 말레이시아 본토가 아닌 동말레이시아의 쿠칭과 사라왁, 코타키나발루 등에도 중국계가 꽤 있으며 다수는 아니더라도 이곳저곳에 중국계가 흩어져 있다. 심지어 이슬람 일색으로 알려진 클란탄 주에도 10% 남짓의 상당수 중국계가 전당포 등 이슬람 율법이 금하는 일들을 주로 하며 살아가고 있다.
2. 역사[편집]
말레이시아 내의 중국인 공동체는 역사가 오래되었다.
중세 때인 명나라 때부터 말레이 반도와 주변 섬들로 주로 푸젠성 및 광동성, 하이난성 출신 중국인들이 이주했다. 이들은 툭하면 푸젠 등 남부 연안에서 약탈을 벌이는 왜구를 피하여 그리고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흉년을 피하여 남하했다.
이후 명나라가 만주에서 새로 일어나는 청나라에 의해 요동을 상실하고 청이 내몽골을 정벌해 몽골 고원을 장악한데 이어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비참하게 멸망한 뒤 명나라를 이은 남명에 충성하던 남방 푸젠인들과 객가인들이 만주족의 청나라를 피해 남하했다.
그리고 북방에서 내려오는 만주족 및 몽골족을 피해 베트남, 태국, 미얀마, 필리핀 등지로 흩어졌고, 개중에 말레이 반도 일대로 이주한 사람도 있었다. 남명은 단명했고 동녕 왕국도 3대만에 간판을 내리며 이렇게 만주족을 피해 남방으로 도피하는 사람이 많아졌다.[5]
이후 19세기에 노예 무역이 국제적으로 금지되고 말레이 반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은 뒤에 주석 광산에서 일할 노동력이 필요해진데다가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말레이 반도 내 주석광산 노동력을 중국인 저임금 미숙련공인 쿨리들을 이민으로 받아 채우기로 하자 현재의 말레이시아인 말레이 반도와 부속도서인 싱가포르, 페낭, 사바 일대로 청나라 남방 출신 쿨리들이 많이 이주했다.
특히 청나라가 망조든 19세기부터 이민이 활발하였는데 이는 중국 내부의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1790년대 3억 명이던 청나라 인구가 1850년 무렵 4억 2천만여 명으로 급증하면서 쌀 가격이 폭등하였고 인플레이션 효과로 실질소득이 줄어들었다.
납세 수단인 은과 관련하여 청나라 조정은 동전을 평가절하하면서 농민들의 생활 조건은 더 악화되었고 이 때문에 소작농 상당수가 말레이시아 주석 광산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940년대에 영국령 말레이 반도 식민지가 태평양 전쟁 연간 일본군의 침략을 받았을 때에 이 곳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계 커뮤니티를 탄압한 적이 있었다. 이 때 화교 학살도 벌어졌으며 위안부로 끌려간 화교 여성들도 많았다.
현재야 경제적 교류가 활발하고 일본 문화가 인기를 끌면서 겉으로 반감이 드러나는 건 아니지만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교과서[6] 에선 일본군의 만행을 그대로 소개하며 날을 세운다.
일본이 말레이 반도 화교들을 탄압한 이유는 중일전쟁으로 적성국가가 된 중화민국과 이들 화교들이 교역했기 때문으로 화교들을 잠재 위험인물로 간주하여 학살하고 괴롭힌 것이었다.
그러다가 1945년 원자폭탄 2방에 일본이 나가 떨어지면서 영국군이 말레이 식민지를 탈환, 수복하면서 일본군은 전원 쫓겨났고 화교들 역시 탄압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일제에서 해방된 후 말레이 반도는 다시 영국령으로 반환되었다.
이후 1959년 말레이 연방이 영국에서 독립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내에서 말레이계와 화교 간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였고 결국 1965년 다시 말레이 연방에서 중국계가 많은 싱가포르가 등 떠밀려 독립했고 1969년에 말레이시아에서는 반화교 폭동까지 일어났다.
이는 말레이계가 중국계에게 경제력에서 뒤쳐지던 상황에서 야당이 총선에서 선전하자 화교들이 정치권까지 장악하는거 아니냐는 공포에서 나온 것으로 이 때문에 이 시절에 말레이시아 내의 중국계 커뮤니티는 큰 피해를 입었다.
부미푸트라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이래로 중국계의 경제적 기득권을 인정하는 대신 말레이인이 경제권의 일부를 나눠가지는 식으로 타협을 보게 되었고 중국계는 경제, 말레이계는 정치, 인도계는 군대 및 경찰, 공직 등으로 각각 영역을 나누게 되어 현재는 좀 나아졌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말레이계와 중국계는 감정이 좋지 않으며 이는 인도계와 말레이계도 마찬가지라서 이는 말레이시아 사회의 큰 문제가 되고 있다.
3. 언어와 종교[편집]
말레이시아 내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은 자신들끼리는 표준중국어를 공용하는데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섞였기 때문이다.
공용어로 쓰는 영어, 국어인 말레이어, 중국계 간 통용어인 표준중국어에 더하여 자신들끼리 가정에서 모어로 쓰는 광동어, 민남어, 치우차우, 객가어 등 각종 중국어 방언까지 여러 언어를 쓴다. 영어가 제1언어로 자리잡으며 중국어 방언이 젊은 층에서 대거 말소된 싱가포르의 화교 사회와 달리 말레이시아의 화교 사회는 젊은 층에도 어느 정도 방언이 보존되어 있다.
가정에서는 여러 중국어 방언을 사용한다. 광동어, 민남어, 치우차우, 객가어, 하이난어 등 중국 남부의 방언을 자주 쓰는 경우가 많이 있다. 특히 푸젠성 출신들이 제일 많아 민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페낭에서는 특히 민남어를 많이 쓴다.
쿠알라룸푸르에는 광둥성 출신들도 많아 광동어도 자주 쓰이며 조호르 주에서는 객가인 혈통이 많아 객가어를 많이 사용한다. 그 외 광둥성 동부 차오저우 출신들도 꽤 있다. 이들은 치우차우라고 불리며 타 중국인들과 구별되는 부분이 많다.[7]
말레이시아의 중국계는 성씨로 출신지를 대충 알 수 있는데 오(吳)씨를 Ng라고 표기하면 광동계, Goh라고 표기하면 푸젠계이고 진(陳)씨를 Chan으로 표기하면 광동계, Tang으로 표기하면 차오저우계[8] , 그리고 Tan으로 표기하면 푸젠계이다. 임(林)씨의 경우 광동계는 Lam, 푸젠계는 Lim으로 표기한다.
그 외에도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 상호간에 의사소통을 위해 표준중국어가 쓰이는 경우가 많으며 표준중국어를 모르는 경우에는 국가 공용어인 영어도 의사소통으로 자주 쓰이고 있다.
그리고 말레이어가 국어로 지정되어 있고 제1언어인지라 당연히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도 대부분 말레이어를 할 줄 안다. 말레이시아는 부미푸트라 정책에 의해 말레이어가 뭐든지 우선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말레이어와 중국어가 혼합된 바바 말레이어라는 언어도 쓰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집 밖을 나오면 중국계끼리는 표준중국어[9] 로 소통하며 타 인종이나 외국인과는 영어, 말레이인들과는 말레이어를 쓴다고 보면 편하다.
대부분의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를 믿지만 일부는 이슬람교[10] 를 믿으며, 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싱가포르의 영향을 받으며 기독교를 믿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기독교를 믿는 중국인들은 대게 개신교 신자들로 영국 영향으로 감리교와 성공회 신자가 많고 그 다음이 장로교이다.[11]
원래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사회는 싱가포르와 비교해서 불교 및 도교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았다. 리콴유의 다문화 융합 정책으로 서구화가 심했던 싱가포르와 달리[12]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사회는 전통을 보존하는 추세였기에 그랬다.
그러나 싱가포르와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중국계 싱가포르인 목사들이 선교사로 말레이시아에 선교하러 나가면서 기독교 인구가 10-20대를 중심으로 급증하기 시작했으며 한 예로 20대 여성 가수인 쥬쥬아이는 싱가포르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개신교 신자이다.[13]
4. 기타[편집]
싱가포르는 화교가 다수를 차지하는데다가 같은 푸젠성 기반이라는 지역 배경을 두고 있기 때문에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은 싱가포르와 교류가 많다.
애초 원래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와 같은 나라였다가 떨어져 나갔을 뿐이며 지금도 조호르 주는 마치 싱가포르의 위성도시인 양 되어 있는지라 교류가 많은 게 당연하다. 그래서 조호르는 오히려 말레이시아 기준 물가가 비싸다.
특히 조호르바루-싱가포르 북부 간 국경지대인 우드랜드(Woodlands) 및 서부 투아스(Tuas)는 통근/통학하는 사람 수가 많으며 싱가포르 내 호텔이 숙박이 힘들면 차선책으로 조호르바루로 가서 숙박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역시 푸젠성에서 떨어져 나간 푸젠 문화권 대만과의 교류도 많이 있다. 이들 모두 민남어를 쓰는 호키엔(Hokkien)이라 불리는 푸젠성 문화권이라 공통점이 아주 많다.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걸그룹으로 2019년까지 활동한 아모이 아모이(Amoy Amoy)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멤버는 물론 대만인 멤버도 섞여 있고 아모이(Amoy)는 푸젠성의 최대도시 샤먼시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홍콩/마카오는 광둥성에 속했다가 영국, 포르투갈에 지배를 받아 떨어져 나간 광동 문화권으로 푸젠 문화권과는 이질적이라 조금 거리감을 느끼는 편이다. 언어부터 말레이시아 중국계 사회에서 쓰는 민남어는 홍콩 및 마카오에서 쓰는 광동어와 완전히 다른 말이다.
그러나 홍콩에서도 푸젠인 출신들이 꽤 많은데다 홍콩에서는 객가인 혈통들도 많고, 무엇보다도 국제도시 홍콩의 메리트에 끌려 해외취업하러 말레이시아에서 홍콩으로 오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수도 많다.
중국 대륙 즉 중국본토와의 교류도 활발한 편이다. 경제적으로는 교류가 활발한데 특히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푸젠성과 교류가 많으며 샤먼시에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세운 기업들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 상하이 금융가에서 일하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도 많다. 이들은 표준중국어를 사용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국에서 이런저런 이점이 많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자체가 워낙 대만과 친한 편이라 중화민국을 정통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에는 아직 거리감을 많이 느끼며 특히 시진핑 집권 후 막무가내식 외교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반중 감정을 갖고 못 마땅해하는 사람도 많아 중국을 그닥 친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은 싱가포르의 중국계 싱가포르인과도 같다. 특히 대만과의 관계 덕분에 중화민국을 정통 중국으로 보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아직까지 비정통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14]
말레이시아도 한류가 유행하지만 그 정도는 주변국인 중국, 대만, 홍콩[15] , 일본 등에 비하면 덜하며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중에서 생각보다 혐한 성향의 인물들도 많이들 있다.
중국계는 오랜 시간 동안 부미푸트라 체제에서 2등 국민으로 취급받았으며 경제에 대한 기여도에 비해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단 피해의식이 아주 강하지만 문제는 이들도 시간이 지나자 흑화되어 말레이인들이랑 다를 게 없을 정도로 외국인에게 배타성을 보인다.
이는 중국 대륙 출신 중국 본토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극렬한 혐중으로 표출되어 대륙인을 혐오하고 싸잡아 욕하게 되며 아예 외국인인 한국인와 일본인에게는 더하다. 나미위 같은 혐한, 혐중, 반말레이 인종차별주의자가 나오기도 하고 중국계가 대부분인 페낭에서는 림관엥이라는 제노포비아 성향의 우익 정치인이 인기인 것을 봐도 중국계의 피해의식과 배타성이 심한 걸 알 수 있다.
일본에 대해서도 반감이 심한데 그 이유는 유독 일본이 말레이 연방 식민지인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 싱가포르에 잔혹 행위를 많이 저질러서이다. 을사조약까지 포함해 40년이나 일본에 나라를 피탈당한 한국인보다 더 일본에 대한 반감이 심하다.
월남전쟁과 중월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화교 추방으로 인해 말레이시아로 온 중국계 베트남인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귀화해서 현재는 말레이시아 국적이다. 말레이시아에서 베트남 식당에서 1970년대에 피난 온 사람들이 운영하는 곳도 많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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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당시 출산율 자료를 보면 1950년대에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의 합계출산율이 대만과 중국본토보다도 더 높은 7~8명대였다. [2] 영어 구사력이 높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은 영어가 제1언어인 이웃이자 같은 나라였던 싱가포르로 대거 건너갔으며 다시 여기서 영어 원어민 국가인 영국이나 호주, 뉴질랜드로 이민가기 시작했고 상당수는 대만, 홍콩 등으로 이주했었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 북미로는 거리가 너무 멀어 잘 안 간다. 사실 싱가포르로 내려가는 사람 외엔 대부분 호주로들 가는 편이다.[3] 이러한 조짐은 이미 1960년대 말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말레이인들의 출산율이 3~4명대를 기록할 동안 중국계 출산율이 2명대 내외를 기록했고(그래도 싱가포르에서의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의 출산율보다 훨씬 높았다. 싱가포르가 1960년대~1970년대에 나라가 과포화되는 인구과잉 우려가 커서 산아제한 정책을 열심히 폈기 때문이었다. 싱가포르의 산아제한은 현재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어 싱가포르는 외국인, 특히 동남아시아 주변국 화교들 및 홍콩인, 대만인 등의 귀화를 적극 받아들인다.) 2000년대에 말레이시아 전체 출산율이 3명 이하로 떨어짐에 따라 중국계 출산율은 중국본토와 비슷한 출산율을 보이다가 2013년부터는 중국본토보다 출산율이 낮아졌다.[4] 사실 말레이시아에서 독립을 진짜 원한 곳은 싱가포르가 아닌 페낭이었다. 정치적 문제로 리콴유가 연방 축출 직전 선수를 쳐서 싱가포르가 독립하면서 페낭은 결국 독립하지 못했다.[5] 변발을 강제하는 치발령을 피해 내려가는 사람도 많았다. 치발령을 위반한 마을은 마을 전체를 몰살했기에 그렇다.[6] '외국인 학교'가 아니므로 말레이시아의 국가 교육과정에 의해 편찬된다. 단 언어가 중국어일 뿐이다. 중국본토나 대만 교과서를 가져다 쓰지 않고 말레이시아 자체 교과서를 쓴다. 그래서 중국어는 중국언데 잘 보면 중국 느낌이 안 난다.[7] 조주계는 보통 민남어와 같은 민 방언 계열로 간주된다.[8] 한국에서 특이한 성씨를 가진 배우로 유명한 탕준상이 여기에 해당된다.[9]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보통화가 아닌 화어(華語)로 호칭하며 중국 보통화와는 다른 언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도 여러 단어, 신조어 등이 영어와 말레이어로 구성되어 있어 중국 보통화와는 물론 대만 국어와도 크게 이질적이다.[10] 이슬람교로 개종한 중국계 인구는 4만여 명 이상으로 이 중 후이족 인구는 2천여 명 정도로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는다. 말레이시아 내에도 바바(남)/뇨냐(여)로 불리는 중국계+말레이계 혼혈인들인 프라나칸들이 거주하고 있어서 이 페라나칸들을 중심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비중이 있다. 이런 경우 통계가 말레이인으로 잡혀서 그렇지 이슬람으로 개종한 프라나칸 인구까지 치면 중국계 말레이시아 무슬림 인구도 결코 적은 비율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중 무슬림들은 말레이인들과 같은 종파의 순니파 샤피이파 이슬람교를 믿음에도 혈통을 강조하는 부미푸트라 정책에 의해 차별을 받고 있다.[11] 싱가포르는 원래부터 기독교 선교 역사가 뿌리깊었으며 현재도 기독교를 믿는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대졸 및 대학원 졸업 이상의 고학력자로 싱가포르의 엘리트들이다.[12] 물론 중국계 싱가포르인들도 50대 이상 기성세대는 전통을 보존한 경우도 많아 불교나 도교 등을 많이 믿는다. 고학력자 및 MZ세대로 갈수록 서구화가 심해져 영어가 모국어화되고 무종교인이나 기독교 신자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13] 쥬쥬아이는 애초 싱가포르 국경에 접하는 조호르 주 출신이다.[14] 여담으로 중일전쟁이 한참 터졌을 당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화교들은 중화민족으로서 나름 동질감을 느끼면서 이 당시 전쟁으로 고전하고 있던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에게 후원금을 많이 보태주기도 했었다. 이 때문에 1942년 일본이 말레이 반도를 침략했을 때 중화민국과 내통을 한다는 이유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화교들이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싱가포르는 나라 차원에서 지금도 일본에 뒷감정을 좋지 않게 갖고 있다.[15] 이웃한 마카오는 보통 홍콩과 세트로 엮인다.